제조업 수출주도 경제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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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직필

제조업 수출주도 경제의 위기

by 경향 신문 2022. 9. 7.

한국경제는 중대한 변동의 압력을 받고 있다. 무역수지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지난 8월 무역수지는 94억7000만달러 적자, 8월까지의 누적 무역수지는 247억2000만달러 적자였다. 이는 모두 1956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의 적자 수치다. 그간 제조업 수출은 한국경제의 엔진이었다. 무역적자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제조업 수출이 주도하는 성장모델이 위기 국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의 수출은 제조업 경제의 근간이다. 그간 무역흑자의 주축은 반도체 수출과 중국에 대한 흑자였다.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8월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대비 7.8% 감소했고 대중국 수출은 5.4% 줄었다. 1990년대 이래의 한국의 성장모델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중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자국 제조업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과 산업정책의 시대로 들어섰다. 미국과 중국의 정책 변화가 그간 한국의 성장모델을 위협하고 있다.

영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세계 최선진국으로 부상한 고전적 사례다. 영국 사례에 기초한 자유주의 이론은 고전파 경제학의 주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자유무역주의는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도 자유무역주의의 정착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거의 완성된 1846년에 이르러서야 무역장벽인 곡물법이 폐지되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 서유럽은 자유무역지대로 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밖의 세계는 대부분 자유무역 밖에 있었다. 서유럽 세계 안에서도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은 공존했다. 특히 미국과 독일과 같은 후발 선진국은 보호무역을 통해 근대국가체제를 만들어갔다. 국가형성기의 미국과 독일은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제조업주도 성장모델을 구축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이를 대표하는 이론가들이다. 우리는 지금 미국에서 다시 해밀턴과 리스트의 아이디어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해밀턴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독립전쟁 중 발생한 부채를 액면가로 상환하게 함으로써 연방정부의 신용을 확립했다. 연방정부는 주 정부 부채를 인수하고 이를 상환하기 위해 새로운 채권을 발행하도록 했다. 그의 관심은 연방정부가 주도하는 재정 및 금융체제를 구축하여 미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해밀턴은 관세를 국가재정의 주요 원천으로 간주했다. 강력한 국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외국 산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통해 미국의 산업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제조업의 이익만을 옹호한다는 농민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유치산업 보호보다는 관세수입 증대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의회에 제출한 ‘제조업자에 대한 보고서’에는 산업 강화를 위한 초기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스트는 보호무역을 통해 제조업을 육성한다는 아이디어를 본격화했다. 리스트는 대학교수로 헌법활동을 하다 투옥되기도 하고, 망명·사업·언론·정치활동 등 파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영국과 영국을 바싹 추격하던 미국의 경험을 깊이 탐구했다. 그는 영국이 물적·정신적 역량을 갖추게 된 출발점이 제조업의 힘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미국이 강력한 국가시스템을 구축한 데에는 제조업 육성, 관세 부과, 연방은행 설립, 전국적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이 작용했다고 보았다.

리스트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시장’보다는 해밀턴의 ‘국가이익’이 현실적 개념이라고 보았다. 그는 민족의 경제발전 단계를 나누고 각 단계에 부합하는 무역 및 산업정책을 제시했다. 그에게 자유무역은 영국을 추격하려는 국가들에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수단일 뿐이었다. 리스트는 후발국이 제조업 역량을 갖추려면 강력한 국가와 보호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01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계는 다시 해밀턴과 리스트의 시대가 되고 있다. ‘중국제조 2025’는 국가이익을 앞세운 적나라한 산업정책이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 전기차 보조금도 그와 다르지 않다. 미국이 제안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4개국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도 자국의 제조업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다.

한국의 제조업주도 성장모델은 글로벌 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미국·중국의 제조업 경쟁은 한국이 직면한 새로운 환경이다. 소득주도성장이냐, 민간주도성장이냐를 다툴 때가 아니다. 제조업 성장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가 당면한 결정적 문제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연재 | 경제직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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