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커의 신화, 혹은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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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직필

볼커의 신화, 혹은 착각

by 경향 신문 2022. 5. 4.

세계 경제가 1970년대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1984년 이후 최근까지 물가가 안정되어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떠도는 ‘신화’가 있다. 여러 경제학자들은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 의장 폴 볼커의 단호한 통화긴축이 경제주체들의 신뢰에 영향을 미쳐 물가안정을 가져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역사에 대한 무지이거나 비양심이다.

당시 볼커는 지급준비금(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해둔 화폐이며 본원통화의 한 부분)의 양을 일정 목표 범위 내로 묶어둠으로써 물가를 잡겠다고 했다. 돈의 양인 통화량을 줄이면 물가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통화주의 교리가 그 근거였다. 그러나 연준은 약속했던 통화량 목표를 단 한 해도 지켜내지 못했다. 그와 같은 역사적 진실 앞에서 볼커의 신화는 궁색하다.

볼커가 했던 일은 통화량을 조절한다면서 단기이자율이 20%를 넘나들어도 내버려 둔 것이었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처음에는 채권시장이, 그런 다음에는 실물경제가 영향을 받았다. 연준은 통화주의 실험을 위해 경제의 목을 조르는 선택을 했다. 사실 물가안정이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볼커의 실험이 실패했음은 이후 연준이 통화량을 관리하려는 통화량 목표제를 폐기한 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볼커가 따랐던 통화주의는 이제 과거의 낡은 유습 이상이 아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2022년 오늘도 관료와 매체, 지식인들이 그것을 여전히 변함없는 진리인 양 여기지만 말이다.

통화량이 늘면 그 결과 물가가 오른다는 ‘화폐수량설’의 직관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화폐수량설은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의 역사에서 그 오류가 가장 많이 입증된 가설이기도 했다. 그 가설이 틀렸음은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의도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사실과 다르다. 물가와 통화량이 일대일 관계인 것도 아니다. 인과관계가 반대여서 물가가 원인이고 통화량이 결과일 수도 있다.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생각은 금본위제에서나 통하는 옛날이야기다. 금은 한정되어 있는데 금과 교환되는 지폐의 발행을 늘리면 지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낡은 생각이 지금도 여태 고집된다. 하지만 이를테면 베네수엘라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은 이유는 미국의 주도면밀한 개입과 유가 하락으로 석유에 의존해온 경제구조가 망가진 때문이지 복지 포퓰리즘에 돈을 너무 많이 풀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현대자본주의가 경험한 주요 인플레이션 사례는 대개 공급 측면에서 생산비용을 상승시키는 요인에 의해 발생했다. 사람들이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즉 경제의 수요 측 요인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현실화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공급 측면에서 고비용을 수반한 병목 현상이 없는 한 인플레이션은 보통 문제되지 않는다. 볼커의 실험기간을 거치면서 물가가 결국 안정될 수 있었던 비결도 마찬가지로 공급 측면에서 발생한 변화에 기인했다.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오르자 북해와 시베리아, 알래스카, 멕시코만에서 신규 유전이 개발되고 석유수출국기구에 소속되지 않은 나라들이 원유 공급을 늘린 것이 주효했다. 국제원유시장은 1980년대 중엽부터는 오히려 공급 과잉으로 반전되었다. 같은 시기에 세계화가 확산되면서 제조업 생산 공정이 저비용의 이점을 좇아 신흥국으로 이전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과정에서 선진국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약화된 것도 생산비용 절감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시 우리 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미국의 3월 개인소비지출 물가상승률이 6.6%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1분기 성장률은 작년 4분기 대비 마이너스 1.4%(1년간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의 연율)로 나타났다. 작년 4분기 성장률이 6.9%로 높았던 탓에 1분기 수치가 나빠진 효과도 있으나 그래도 예상을 밑도는 실적이었다. 이에 연준이 당장 이번주 기준금리의 대폭 인상과 함께 보유자산을 축소하는 양적긴축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오늘 다시 볼커가 소환되는 배경이다. 그가 했던 것처럼 과감한 조치로 민간의 물가예상을 꺾어야 하니 경제의 목이라도 조를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공급 측 물가 압력은 통화긴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린다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중국 봉쇄가 풀릴 리 없다. 긴축에 나섰는데 물가를 못 잡으면 인플레이션이 경기침체를 수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을 자칫 중앙은행이 나서서 키우는 격이다. 금리 인상으로 민간의 기대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겠다는 당국의 희망 역시 막상 실증적인 기초가 취약한 처방일 뿐이다. 볼커의 신화는 착각이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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