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부터 복사기를 만든 독일 베를린의 기업 로타프린트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살아남았다. 건물 몇 개만을 남기고 설비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로타프린트는 다시 영업을 시작했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폐허를 추스를 동력을 얻었다. 생산시설을 확충해야 할 만큼 물량이 늘었고, 증축 프로젝트는 신진 건축가 클라우스 키르스텐의 손에 맡겨졌다. 키르스텐은 남아 있던 빌헬름 시대의 건축물에 새롭게 움트던 산업 문화를 접붙였고, 그 결과물은 이후 1991년 베를린시 지역보존 감독관에 의해 역사적 보존 대상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건물은 보존 대상으로 남았지만 로타프린트는 그렇지 못했다. 로타프린트는 1989년 파산했고, 로타프린트의 생산 부지 및 건물들은 시 소유로 넘어갔다. 보존 대상으로 지정된 덕에 아름다운 건물은 헐리지 않고 남았지만, 그렇다고 영영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시 정부는 건물을 임대로 운영해오다가, 2002년 시 산하 펀드로 넘겼다. 매각작업을 위한 수순이었다. 상업 부동산 자본이 이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이 건물의 운명은 어떻게 흘렀을까?

 

리노베이션된 옛 로타프린트 사옥. 엑스로타프린트 제공

 

다행히 이야기는 뻔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다. 2004년 건물의 임차인이자 시각예술가이던 다니엘라 브람과 레스 슐리서는 건물을 매수하겠다는 계획에 돌입했고, 임차인들을 모은 연합체 엑스로타프린트(ExRotaprint)를 매수 주체로 내세웠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엑스로타프린트는 끈질기게 노력했고, 시 의회와 펀드도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에 응했다.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1958년 클라우스 키르스텐의 손을 거쳐 탄생한 아름다운 건물은 현재 비영리 유한회사로 탈바꿈한 엑스로타프린트의 소유다. 엑스로타프린트는 건물을 사들인 후 리노베이션을 단행했고, 현재는 다양한 예술가 조직, 사회단체, 제조업체들에 저렴한 임대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런 결말이 가능했던 것은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들 덕택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건물이 자리 잡은 토지의 주인인 트라이아스 재단과 에디트 마뤼온 재단이다. 2007년 건물이 팔릴 때, 두 재단이 토지 부분을 매수하면서 엑스로타프린트에 99년짜리 토지 사용 계약을 체결해준 것이다. 엑스로타프린트는 이 계약 덕에 전면적 토지 사용권을 갖고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리노베이션을 위한 225만유로의 대출금은 스위스의 코오페라 연기금으로부터 왔다. 코오페라 연기금 역시 사회적 지향을 갖거나 생태, 문화적 프로젝트에 투자한다는 원칙 아래 움직이는 자본이다. 현재 엑스로타프린트가 거둬들이는 임대료는 토지 사용료를 지불하고 리노베이션을 위해 빌린 대출금의 원리금을 갚는 데 사용된다. 엑스로타프린트가 거두는 임대 순수입의 10%, 토지 가치의  5.5% 중 큰 금액이 토지 사용료로 지불된다. 이 돈으로 두 재단은 비슷한 목적의 다른 프로젝트에 또 자금을 댄다.

 

코오페라 연기금과 두 재단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거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익을 전혀 거두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도 아니다. 이들의 재무적 목표는 당장의 가장 큰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안정적이며 적정한 이익이다. 목표를 이렇게 잡는다면, 사회적 가치는 재무적 목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무적 목표를 강화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선의가 있지만, 그 선의는 합리적인 방법론에 따라 움직인다.

 

엑스로타프린트도 이 합리적 선의에 화답한다. 엑스로타프린트의 주주인 임차인들은 회사의 비영리적 속성에 합의하는 주주 간 계약을 체결했다. 주주들은 건축사적 기념비인 건물을 보존하며 문화 예술 진흥을 회사의 목표로 삼기로 약속했고, 모든 비용을 치른 후 남는 수익은 공익을 위해 재투자하기로 정했다. 그 자신이 임차인이었던 주주들은 임대사업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안정적 사업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주주 간 계약은 그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쓰였다.

 

엑스로타프린트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이들의 철학이자 원칙을 담은 인상적인 문구들을 만날 수 있다. “연대 시스템으로서의 임대” “사적 소유권 없는 소유권 모델” “비영리(non-profit)가 무영리(no-profit)는 아니다”. 엑스로타프린트에 돈을 댄 이들은 적정하고도 안정적인 이익을 거두어 가고, 부동산 사용자들이 스스로 운영의 규칙을 결정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모델이 만들어지는 데 3년이 걸렸다는 점이다. 매각 준비가 시작된 시점부터 따지면 5년이다. 베를린시는 문제를 손쉽게 털어내는 대신,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 않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도가 없지는 않다. 필자가 사외이사로 있는 (주)공공그라운드는 엑스로타프린트의 뜻과 다르지 않을 ‘시민 자산화’의 목표를 갖고 설립되어, 2017년 10월 구 샘터 사옥을 매입했다. ‘혜화역 담쟁이 벽돌 건물’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랜드마크이자,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공공그라운드는 최대 이익을 위해 증축하는 대신 건물 외양을 그대로 보존했고, 사회 혁신을 위한 다양한 실험 조직들을 임차인으로 불러들였다. 공공그라운드도 엑스로타프린트처럼 장기적으로 시민들의 손에 안착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도 트라이아스나 에디트 마뤼온 재단과 같은 자본이 있을지, 장기적 호흡을 가지고 움직여줄 공적 주체가 있을지에 달린 일이다. 을지로 공구상 거리, 목포 구도심의 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떠들썩한 논쟁 안에 선거 주기를 따르는 정치만 있고, 길게 남아야 할 문화와 시민은 없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제현주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 대표>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