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제도란 볼트와 너트로 구성된 강철 구조물이 아니라 진흙으로 연결한 수수깡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 비유는 더 상세해졌다. 법률과 물질적 인센티브로 구성된 공식 제도는 수수깡이고 사회규범과 같은 비공식 제도는 진흙이다. 말랑했던 진흙이 바삭하게 마르듯 규범이나 관습이 반복되면 움직일 여지 없이 점점 굳는다. 결국 수수깡-진흙 구조물은 작은 충격에도 부서지기 쉬워진다. 맹커 올슨이 논증한 것처럼 지배집단의 자기 이익 추구가 제도화하고 사회도 이를 용인하게 되면 국가는 딱딱해져서 내부의 압력이든, 외부의 충격이든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또는 급격하게 쇠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일까? 우리 사회의 지배집단이라면 누가 뭐래도 재벌-고급관료-보수언론의 삼각동맹이다. 이들이 하청기업을 마른 수건 비틀 듯 한껏 짜낸 결과는 제조업의 생산성 위기로 이어졌고 바짝 말라붙은 공간에는 혁신기업이 나타날 틈이 없다. 성장률은 나날이 떨어지고 지배집단의 지대 독점은 단 20년 만에 한국의 불평등을 세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이룬 참으로 장한 성취인데도, 그 어떤 반성도 없다.

 

이 구조의 정점에 있는 더 한심한 세력이 그들에게 항상 면죄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범은 물론 법도 무시하는 이들이 그래도 건재한 건 수많은 조력자가 있는 탓이다. 부동산과 학벌은 한국 계층 상승의 좁다란 오솔길이다. 웬만한 이들은 온 힘을 다해서 어떻게든 양대 자산을 부풀리려 한다. 아뿔싸, 두 자산을 둘러싼 경쟁은 죄수의 딜레마이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하고(뒤처진다는 공포), 남들이 안 해도 내가 한다면(앞서 가려는 탐욕)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남들이 사교육을 시키건 안 시키건 나는 사교육에 매진할 것이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기득권자들의 승리 확률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경쟁이 빚어내는 사교육과 부동산 가격 상승이 그 메커니즘이다. 돈 많은 집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집 있는 사람들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노력할수록 보통 사람이 이길 확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안 할 수도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배신, 즉 사교육과 부동산 투자는 강한 우월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리도 손쉽게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이 어디에 또 있을까? 양반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특권을 폐지하려는 게 아니라 상민들도 돈 모아 양반 족보를 사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구한말과 무엇이 다를까? 양대 자산은 점점 더 큰 규모로 세습된다.

 

뻔한 부자들뿐 아니라 정치인, 관료, 그리고 웬만한 언론인과 학자 등 지식인까지 40대를 넘어서면 거의 모두 소득 상위 10%에 들어간다. 자산으로 치면 더 높은 순위로 올라갈 것이다. 이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양대 자산의 투기를 선도하면서 사적소유는 불가침이며 단지 효율성을 높이는(높은 가격을 치르려는 사람에게 소유권이 돌아가야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경제학은 가르친다) 시장거래일 뿐이라고 옹호한다.

 

민주주의는 이런 불평등 메커니즘을 시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게임 구조상 거의 100% 질 게 뻔한 ‘루저’들도 승리할 수 있도록, 적어도 패배의 확률이 낮아지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정치다. 하지만 2008년 총선에서 거대 양당의 현수막은 똑같은 글씨로 채워졌다. 첫째는 뉴타운, 둘째는 특목고였는데 종부세나 사교육에 대한 태도를 보면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상층에 속하는 이들이 놀랍게도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겨 스스로를 위한 정책을 세운다. 머릿수도 많고 목소리는 더욱 큰 베이비붐 세대가 이들을 뒷받침한다.

 

상위 10%를 부모로 두지 못한 90%의 젊은이들이 절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들은 ‘노오력’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자기 안의 능력도 같이 버린다. 아니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 자신이 겪은 상실감과 무력감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이를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한다. 출산율 저하의 근본 원인은 불평등이다.

 

아마티야 센은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일에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이며, 자유의 확대가 곧 발전이라고 갈파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국은 저성장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마이너스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내부에 회복탄력성을 지니지 못한 사회는 붕괴한다. 촛불 대부분은 대통령만 교체되면 이 답답한 구조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직 3년 넘게 남았고 정책은 얼마든지 있다. 진흙에 약간이라도 물기를 더해 움치고 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선거제도부터 바꿔야 한다. 젊은이와 소수자의 이해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참 소박해진 내 새해 희망이다.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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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