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돈을 빌리는 게 어려운 사회가 바람직한가, 쉬운 사회가 바람직한가.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을 지고 살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계가 소비를 늘리거나, 부동산을 매입하려 금융회사로부터 돈을 빌려도 노동·자본소득으로 제때 상환하면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한 개인이 과도한 빚에 짓눌려 살아가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할 의욕이 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소중한 인적자원이 사장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뇌관이니, 시한폭탄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건 부채의 규모뿐 아니라 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보통 젊은 시절에는 소득이 소비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빚이 많다. 중년이 되면 소득이 늘어 차츰 빚을 줄이고 저축을 하며 노후에 대비해야 한다. 이게 정상적 라이프 사이클이지만 한국에선 무너진 지 오래다. 가계부채에서 40~50대 비중이 크고 저신용자들은 제2금융권 고금리 빚에 신음하고 있다. 금리 인상기에는 취약계층의 고통이 가중되는 구조여서 경기지표가 금리 인상을 가리키면 온 나라가 잔뜩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깜빡이를 켠 최근 상황이 그렇다.

 

가계부채가 심각하단 얘기는 오래전부터 들렸지만 해결되기는커녕 위기에 둔감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역대 정부의 폭탄 돌리기식 행태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정부도 부동산 경기부양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수 진작을 위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등등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됐지만 본질은 똑같았다.

 

특히 복지 지출을 경원시하고 감세와 노동유연성 확보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구했던 보수정권하에서 중산·서민층의 소득기반은 약화됐다. 일을 해도 소득은 늘지 않고 일자리 사정은 나빠지다보니 자산소득 확대로 눈을 돌리게 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정부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돈을 풀어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려는 시도는 박근혜 정부에서 극에 달했다. 2014년 8월 지역과 만기 등에 따라 50~70%로 차등 적용되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70%로 단일화하고, 지역별로 50~60%로 달리 적용되던 총부채상환비율(DTI)을 60%로 통일한 것은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의 전형이었다. 눈 딱 감고 화끈하게 규제를 푼 결과, 2014년 하반기부터 가계부채는 급증했다.

 

‘플라스틱 버블’로 불렸던 2000년대 초반 카드사태는 섣부른 규제완화가 부른 정책 실패로 회자된다. 가두모집을 통해 소득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신용카드가 마구 발급되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대학 동아리 선배가 카드로 후배 밥을 사주는 일도 많았다. 카드 빚을 못 갚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카드사들은 위기에 빠졌고, 400만명의 신용불량자는 한국 경제에 큰 상처를 남겼다. 진념 당시 경제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이 펴낸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에서 “2001년 당시 금융감독위원회가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을 고쳐 가두모집을 제한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규제개혁위원회는 소득조사를 철저히 해 발급하면 되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행령 개정에 반대했다”고 회고했다.

 

대기업 위주의 수출주도 성장, 부채주도 성장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된 지 오래다. 부채주도 성장에 맞서는 소득주도 성장을 들고나온 새 정부가 가계부채 문제에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려면 접근 방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우선 자신의 임기 내에 고통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님토’(NIMTO·Not In My Term of Office)식 사고를 버려야 한다. 금리 인상과 부동산 거품 빼기가 가져올 파장이 두려워 후임자에게 미루려 해선 안된다. 한은과 금융감독기구의 책임도 무겁다. 가계부채 폭증과 현재의 부동산 과열이 빚어진 데는 한은이 2014년 4월부터 기준금리를 5차례 내린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금융위원회는 인위적 부동산 경기부양이 가계부채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란 입장이었지만 최경환 경제팀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퇴로 마련은 8월 발표 예정인 정부의 가계부채 종합대책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금융권의 부실 방지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서민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부채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새 정부는 부채주도 성장 방식과 결별하겠다며 소득주도 성장을 내걸었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한눈팔다간 예전의 손쉬운 부채주도 성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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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