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8개 회원국과 인근 8개국, 그리고 미국, 일본, 호주, 중국 등 주요 글로벌 경쟁국 10개국을 포함하는 46개국의 혁신지수를 측정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놀랍게도 한국이 1위로 나타났다. 금년만이 아니다. 한국은 이 평가에서 지난 2013년 이후 6년째 줄곧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유럽연합만 한국의 혁신역량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코넬대학과 인시아드(INSEAD),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등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2018 글로벌 혁신지수’에서도 한국은 12위를 차지하여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미국 등보다는 낮지만 일본, 프랑스, 중국, 캐나다 등보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경제의 혁신 역량에 대한 해외의 후한 평가는 혁신이 지지부진하다고 아우성치는 국내의 평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다수 전문가나 언론은 물론이고, 한국경제의 성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경제부총리나 대통령까지도 혁신성장이 답보상태에 있다며 답답해한다. 4차 산업혁명 분야의 혁신이 미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해외의 혁신지수가 다양한 혁신 관련 투입물과 산출물을 모두 포함하여 평가하는 데 반해, 국내의 평가는 오직 혁신으로 인한 성장, 즉 혁신의 궁극적 성과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출발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유럽연합의 지수는 인적 자원, 연구시스템, 혁신친화적 환경, 금융 및 공공 지원, 기업 투자, 혁신활동, 연계활동, 지적 자산, 고용 효과, 판매 성과 등 10개 부문에 해당하는 27개 세부지표의 산술평균으로 계산한다. 유럽연합의 평균과 비교하여 한국이 특히 높게 평가된 세부지표는 고등교육을 받은 25~64세 인구(143.2%), 공공분야 연구개발(R&aD) 지출(129.8%), 민간분야 R&D 지출(241.1%), 공공-민간 공동 논문(156.4%), 공공 연구개발 투자의 민간 공동투자(131.8%), 특허협력조약 기반 특허 출원(161.7%), 상표 출원(233.3%), 디자인 출원(229.9%) 등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은 고등교육과 R&D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그 결과로서 논문과 특허, 상표, 디자인 등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혁신을 위한 투입도 많이 하고 산출도 많이 한다면 당연히 혁신성장도 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유럽연합에 비해 평가가 낮은 세부지표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많이 인용되는 논문(62.5%), 혁신적 중소기업의 타 혁신주체와의 협력(21.4%), 그리고 지식기반 서비스업 수출(44.8%) 등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혁신 관련 산출 지표 중에서도 논문, 특허, 상표, 디자인 등의 수를 세는 양적인 지표에서는 한국이 매우 높게 나오지만, 그러한 산출의 경제적 가치나 질적인 면을 따져보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라이덴랭킹 2018’에서 서울대가 논문 편수에서 세계 9위를 차지했으나 우수논문 비율에서는 603위에 그쳤다는 사실이나, 국제특허에서 거두는 로열티 수입이 특허등록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기술무역수지가 큰 폭의 적자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혁신을 위해 많은 자원을 쏟아붓고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도 그 궁극적 효과인 혁신성장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세계 최고인데 생산성은 구미선진국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문제는 박정희 시대 이래 성립된 추격형, 모방형 성장체제의 후유증이다. 기존 지식의 습득을 중시하는 교육과 모방과 응용 위주의 R&D시스템이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교육은 여전히 정답 맞히기 시험을 통한 서열화 교육이고, R&D는 논문과 특허의 숫자나 부풀리고 목전 이익에만 경도돼 진짜 혁신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면 된다’는 식의 노동 쥐어짜기가 기업에 만연하여 노동자에 대한 인적 자본 투자가 부족하다. 노동시장 진입 이전에는 학력경쟁과 스펙경쟁이 치열하지만, 취업 후에는 선진국 노동자들에 비해 교육훈련과 자기계발이 미흡하다.

 

구시대의 가장 강력한 유산인 재벌체제는 혁신성장을 억압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재벌은 고급 자원을 독점하고, 산업생태계를 지배함으로써 혁신적인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재벌은 우리나라 R&D를 주도하지만 항상 근시안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에만 집착하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나 모험적인 연구를 회피한다. 재벌이 경영권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풍토 탓에 기업가정신이 쇠퇴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위에서 살펴본 혁신지수에서 한국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은 세부지표는 혁신적 중소기업과 여타 혁신주체와의 협력이라는 점은 재벌중심 체제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재벌에 과도하게 많은 자본이 집중되면서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끌어내리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정부 주도 고도성장시대의 유산인 조급증도 문제다. 혁신성장이 잘 이루어지려면 교육과 연구개발 시스템, 그리고 재벌중심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혁신을 고취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개혁이 어려우니 정부는 보조금 퍼주기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려고 한다. 역대 정부는 농업, 중소기업, 벤처 등에 엄청난 지원금을 쏟아부었으나, 그 효과는 매우 의심스럽고 부작용은 많았다. 일례로 중소기업 R&D 지원정책을 분석해 보니, 지원을 받은 기업의 매출 성장이 지원을 받지 못한 기업들에 비해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 혁신 관련 투입 지표와 양적 산출 지표가 매우 높은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적인 효과인 혁신성장이 부진한 것도 지나친 보조금 퍼주기 정책의 결과다.

 

혁신성장은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와 더불어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 항간에선 소득주도성장을 접고 과감한 규제완화로 혁신성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얘기들을 한다. 규제완화가 필요한 부분도 있고 도움이 될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 없이 규제완화를 한다고 혁신성장이 잘될 리가 없다. 소득주도성장도, 혁신성장도 조급해서 될 일이 아니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