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서 났다면 술이나 먹을 수 있나….”

1921년 개벽을 통해서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소설은 한때 대한제국의 후손이었지만 결국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 들어간 우리 문인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술 권하는 일제 치하에서 한국 최고의 블랙코미디 소설가라 할 수 있는 <봄봄>의 김유정은 1937년 2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같은 해 27세의 나이로 ‘오감도’의 이상도 타계했다. 술병으로 쓰러진 이 꽃 같은 나이의 천재들에 비해 정작 <술 권하는 사회>의 현진건은 43세까지 살았다. 이게 바로 일제 치하에서 한국의 청년 문학도들이 살았던 짧고 굵은 삶이다. 술 권하는 사회, 그것은 나라 잃은 처지에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의 일탈적 삶이다.

2014년, 나라는 독립되었고 이 땅의 청년들이 식민지하의 답답함을 토로할 필요는 없어졌다. 행복국가? 국민 ‘항복’ 시대가 펼쳐졌다. 나라는 ‘빚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오르는 전셋값, 아깝기만 한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부도 빚을 권하고, 그들의 부모와 친구들도 빚을 권한다. 김유정이나 이상의 짧지만 굵었던 삶과 다른 것은, 이 빚을 받아 마시면 문학작품이나 예술 한 번 만들어볼 기회도 없이, 바로 ‘하우스푸어’로 직행한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폐지된 ‘거치식’ 대출과 담보대출 상한을 풀어헤친 이 독특한 특수 국면이 만든 기이한 금융 상황 때문이다. 빚 내세요, 빚. 그래야 애국자입니다!

1921년 술을 권하게 만든 그 조선총독부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토건적 경제운용과 은폐된 금융자본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됐다. 비옥한 전라도에서 나온 쌀을 군산항을 통해 실어가던 것을 수탈이라고 부른다. 지금 토건과 금융 자본이 하는 이 ‘빚 권하는 사회’는 학술적 명칭도 없다. 이건 착취도 아니고, 수탈도 아니다. 착취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하는 얘기고, 수탈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에서 하는 얘기다. 그렇다면 2014년 한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겪고 있는 이 기괴한 상황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건 그냥, 정치 실패다. 어떤 경제학 교과서도 이런 상황을 권장하지 않는다.


지금 빚 권하는 사회를 만든 사람들, 하여간 선거만큼은 귀재들이다. 크게 이긴 다음 겨우 이기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크게 이긴다. 어쨌든 빚 권하는 사람들, 선거에서는 무조건 이겼다. 차이는 왕창 이기느냐, 간신히 이기느냐다. 정부도 빚지고 공기업도 빚지고, 이제는 개인들도 빚지게 한다. 담뱃값도 올린다. 담배 살 돈 있으면, 열심히 모아서, 빚 보태 집 사라고, 얼마나 살뜰하신가?

기본적으로 전셋값과 월세는 집의 가치에 비례하기 때문에 집값을 올리면 결국 같이 올라간다. 빚 내서 사람들이 집 사면 전세 사는 사람들의 빚도 같이 올라간다. 기가 막힌 구조이다. 그리고 다시 월세 내기 힘들면 또 빚 내라고 한다. 이 고리를 정부가 끊어줄까? 물론, 안 끊어준다. 술 마시는 김유정과 빚 내는 김 대리, 술 마시는 이상과 빚 내는 이 과장, 왜 우리는 식민지 백성만큼 지금 사는 게 팍팍할까? 김유정이나 이상만큼 삶을 걸 만한 예술을 할 자신 없으면, 빚 내지 마시라. 종국에 ‘훅’ 가는 건 같다. 바로 가거나, 좀 있다 가거나.


우석훈 | 영화기획자·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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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