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한국경제의 화두 중 하나는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 변화다. 중심에는 지난 10일 취임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있다. 지난 14일 홍 부총리는 언론사 경제부장들을 상대로 내년 경제정책 방향 설명회를 열었다. 그의 발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용주의였고, 두 개의 시점을 언급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째, 그는 “경제팀이 민간에 보내는 시그널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며 “민간과의 소통을 남다르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전방위적’ 경제활력 제고를 내년 경제정책 과제의 최우선 순위로 거론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피력했다. 현대차그룹의 서울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설립을 허가하는 방안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3년간 끌어온 이슈”라며 “이달 안에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있은 뒤 이 안건은 지난 19일 국토교통부 수도권정비위원회 실무회의를 통과했다.

 

둘째, 홍 부총리는 “지금이야말로 비공식적 장관 회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녹실회의’ ‘서별관회의’ 같은 비공식 협의체 부활을 알렸다.

 

녹실회의는 1960년대 경제부총리를 지낸 고(故) 장기영씨가 경제부처 장관들과 비공개로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부총리 집무실 옆 소회의실의 카펫과 가구 색상이 녹색이어서 녹실회의로 불렸다. 1997년 시작된 서별관회의는 청와대 본관 서쪽 건물인 서별관에서 열렸다. 장관들과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하는 비공식 회의체로 박근혜 정부 시절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대우조선해양 지원은 서별관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됐다”고 폭로하면서 2016년 6월부터 회의가 중단됐고, 문정부는 서별관회의를 폐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2019년 경제정책방향 안건 보고를 듣고 자리로 돌아오는 홍 부총리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정부의 경제부총리가 개발연대 시절의 녹실회의를 언급한 게 이례적이긴 하나 효용성이 있는 만큼 문제될 게 없다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볼 수 있다.

1기 경제팀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간 갈등으로 시장에서 혼선이 빚어졌고, 이런 점이 반면교사 역할을 하면서 홍 부총리의 위상은 당초 예상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쯤되면 그에게서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이 읽힌다고 해도 과장된 해석은 아닐 듯싶다.

 

홍남기식 흑묘백묘론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도 성과가 없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상황 변화에 대처하고 유연성을 발휘하는 건 좋다. 경제를 살려 민생고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홍 부총리의 실용주의적 행보가 어디까지 뻗칠지 아직 예단키 어렵지만 실용주의적 사고의 위험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원칙을 포기했던 역대 정권들의 후진적 경험이 한국사회에는 누적돼 있다. 재벌총수의 가석방, 사면·복권을 재벌의 경제살리기 약속과 맞바꿔온 게 대표적이다.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단죄하고,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규제를 기업옥죄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색안경을 끼고 재벌 대기업을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뭘 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주장은 곤란하다.

 

보통 실용주의는 위기 국면을 틈타 확산되곤 한다. 하지만 이준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예전에 “실용주의가 도를 넘을 경우 실용주의적 유연성이 주는 이득보다 원칙의 결여로 인해 생기는 손실이 더 클 수 있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홍 부총리는 문 정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을 별로 입에 올리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포기하거나 소홀히 다룰 것이라고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경제·사회의 포용성 강화’가 그가 내세운 내년 경제정책 과제 4가지 중 하나로 엄연히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경제적 약자를 살리는 정책이라면 그것이 소득주도성장이든 포용적 성장이든 네이밍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결국 현 경제상황에 맞게 정책의 재균형을 추구하는 과정에 홍 부총리가 서 있다는 진단이 맞아 보인다.

 

그럼에도 사족을 달자면 홍 부총리가 급한 마음에 단기적 성과에만 매몰된다면 경제지표는 개선될 수 있겠지만 훗날 개혁을 포기하고 손쉬운 성장경로를 택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거창한 말의 성찬은 접는다 해도 양극화 해소는 피할 수 없는 그의 과제이다. 자신의 역할을 위기구원용으로만 한정해선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관철 경제부장>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