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항에 내린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5박6일간의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목표를 꽤 만족할 만큼 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14, 15, 17일 연이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 펜스 미국 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 문제가 속도는 몰라도(이 점에 관해서도 시진핑 주석과 “한반도 문제 해결의 시점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해결 방향과 한국의 역할까지 공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해외 순방은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의 앞날이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APEC 정상회의 사상 최초로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한 것은 불길한 징조다. 2014년 호기롭게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공동선언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뉴기니 총리 말마따나 “방 안의 두 거인”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사사건건 맞섰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이) 스스로 문을 닫는 것은 세계를 잃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고 펜스 부통령은 중국의 기술이전 강요, 지적재산권 침해, 미래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중국이 그들의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 미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미국은 파푸아뉴기니에 미군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중국은 도로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발표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맞부딪친 것이다. 

 

경제학자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에 관해서는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학파를 막론하고 다자주의적 해결, 국제제도의 규범에 의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앤 쿠르거 교수(존스 홉킨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철강 관세를 부과했지만, 국방산업은 전체 철강소비는 3%에 불과하며, 중국 수입 철강은 단 2%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25% 관세 부과는 어디서 생산되든 미국 내 자동차 1대당 가격을 1400달러에서 7000달러 올릴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수긍할 만한 “기술이전 강요” 혐의에 대해서도 다니엘 그로스 유럽정책연구센터 소장은 과거 중국 정부가 그 대가로 지대 인하, 면세, 값싼 대출 등을 제공한 것을 고려하면 미국 기업이 밑질 게 없는 장사였으며 이제 특혜가 라이선스 계약으로 바뀔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중국의 중장기 계획(중국제조 2025 등)도 과거 일본의 산업정책과 다를 바 없으며 미국 또한 국방예산으로 반도체, 인터넷 등 현재의 IT 산업을 키운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닥다리 걷어차기”(장하준)인 셈이다.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가 중국에 대한 압력으로 해결되리라고 믿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국민계정에서 무역적자(흑자)는 저축부족(과잉)의 결과일 뿐이다. 직관적으로 얘기해서 미국의 소비와 투자 등 지출이 국내 저축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적자는 자본수지에서 외국자금의 유입으로 보전된다. 중국 등 흑자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매입이 대표적이다. 독일이나 일본, 한국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적자를 보전하므로, 부동산과 금융 버블에 의존하는 미국 경제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중국에 대한 압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현재의 미국 통상압력은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일환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를 침체에 빠뜨린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중국은 그동안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내수주도형 경제로 신속하게 이행했다. 중국의 무역흑자는 GDP의 1%대로 줄었고, 국공유기업과 지방정부의 부채는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중국의 해외투자 역시 빠르게 진전되어 직접투자도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연간 수여되는 중국의 과학기술 분야 석사 이상 학위는 미국과 유럽을 합친 수치를 넘어섰다.

 

서방언론은 지난 20여년간 두가지 오보를 줄기차게 쏟아냈고 한국 언론은 받아쓰기 바빴다. 중국위기론과 북한붕괴론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의 이번 해외 순방이 순조롭게 결실을 맺는다면 후자는 이제 해외 언론의 단골 메뉴에서 빠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위기론은 오히려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천문학적 규모의 해외보유액과 중국공산당의 일관되고 신속한 대응이 그동안 위기를 봉합해 왔는데 차이메리카(중국의 수출주도성장과 미국의 부채주도성장 간 결합)의 해체와 국제정치적 혼란은 앞으로 중국이 이러한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봐도 미국의 금리 인상과 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혼란에 선제 대응하여 중국 정부가 긴축으로 전환하면 한국은 심각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 쪽에서도 국제 환경의 변화를 면밀히 검토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대안의 제시로 이 지역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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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