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가 그랬던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도를 키운 건 몇 할이 ‘북핵 문제’였을까? 이 여름의 무더위를 더욱 짜증나게 한 이 정부의 경제사회정책을 비판하려다 급히 칼럼 주제를 바꾼 건 문득 떠오른 이 질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북핵 문제는 미국과 북한 간의 관계이고, 북핵협상에 대한 미국 주류의 초당적인 비판에는 자국과 상대국 두 지도자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다. 협상 국면의 한 고비가 될 9월에 때 아닌 살얼음이 뒤덮일 판이다. 양 지도자의 목표는 확실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비핵화 일정을 받아내서 중간선거에서 승리해야 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체제안전을 보장받아 경제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70년간 남북관계의 역사는 8할 이상 불신이었다. 정전 협상에 즈음해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이 빛을 발했고 결국 한·미동맹과 국군의 전력 강화를 얻어냈다. 김일성 주석 역시 북·소, 북·중 동맹을 이끌어냈고 양쪽은 무력통일을 장담했다. 1970년대 초 냉전의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자 남북 모두 내부를 챙기기 바빴다. ‘남북공동선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각각 1인 지배를 강화했다. 단언컨대 요즘 아이들은 ‘국민교육헌장’과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날로 벌어지는 경제적 격차를 이데올로기 강화로 상쇄할 수 없었던 북한은 1970년대부터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썼지만 2차에 걸친 석유위기 와중에 1986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데 이르렀고, 설상가상 1989년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경제체제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체제의 명운을 걸었고, 1993년의 1차 핵위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진노선에 맞춰 끊임없이 ‘경제관리 개선’ 정책을 내놓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전력의 완성을 선언함으로써 1970년대 이래 군사·경제 병진노선을 벗어나 경제에 전념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 메커니즘을 새로 만들지 않고서는 북한 경제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각 기업이나 협동농장이 아무리 노력해 봐야 자기 집단에도, 나라에도 별 변화가 없을 테니 자포자기 상태로 몇백일 작전의 노동 연장으로 공급량을 꾸역꾸역 채우는 게 현재 북한 경제의 현실이다.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급증했지만 생존의 차원일 뿐 투자와 성장의 동적 메커니즘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무역과 사금융의 “위로부터의 시장화” 역시 원자재 수출, 또는 노동력 수출에 의존하고 있을 뿐 이익이 생산적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의 부분적 가격자유화에 따른 인플레이션, 그리고 2009년 ‘화폐개혁’이 초래한 의외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초유의 거시적 충격이었다. 시장확대가 거시적 위기의 전파경로가 된 것이다. 결국 생산성 향상이 되지 않는 한, 시장의 확대나 30여년간 되풀이된 ‘경제관리개선대책’ 모두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다만 과거 전통적 모델의 붕괴를 재삼 확인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확실하다. 첫째는 외교안보 협상에서 북·미 양쪽의 타협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북한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관대한 TFT 전략(상호 보복상황에서의 양보)’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해서 미국 내부의 비관을 희망으로 바꿔야 한다. 이 타협이 중국을 소외시키지 않아야 하니, 고차원의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둘째는 북한의 양보에 대해 우리의 독자적인 보상, 즉 경제적 이익이 피부에 와 닿도록 해야 한다. 지금 북한에 가장 절실한 것은 북한 내부의 ‘과잉화폐(물자부족으로 인한 민간의 과잉 현금 보유)’를 은행에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주민은 적어도 금융에 관한 한, 당국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예금보험공사가 기껏해야 얼마 되지도 않을 북한 예금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박근혜 정부 스스로 폐쇄한 개성공단의 문을 재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자해지일 뿐이며(과연 그런다고 핵공격의 위협이 증가할까?) 이 조치가 미국의 협상에도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나아가 2차 개성공단에 북한기업과 외국기업이 입주할 계획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고 희망이 보여야 비로소 북한도 이미 타국의 역사에서 실효성이 입증된 농업의 자율적 소농 경영이나 군단위의 민간기업 허용, 점진적 가격자유화를 적극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신경제 지도’나 동북아 철도협력 구상, 100조 규모 프로젝트를 제시하는 것은 한가로울 뿐 아니라 북한당국의 자존심만 건드릴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협력으로 북한이 협상 중단을 선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반도의 촛불마저 꺼트릴 수는 없다.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