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돌아가셨거나 병상에 누워 계시거나 고령이다. 그 아들은 ‘포스트 회장’을 준비 중이다. 경영권 승계가 완료된 최태원 SK 회장을 제외하면 한국의 4대 재벌 중 3곳이 현재 맞닥뜨린 현실이다. 한국 재계사에 이런 변곡점은 또 없다.

 

가장 극적인 곳은 구본무 회장이 타계한 LG이다. (주)LG는 다음달 29일 임시주총에서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사내이사로 선임한다. (주)LG가 LG의 지주회사임을 감안하면 구 상무가 그룹 경영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얘기이다. 구 회장 타계 전까지 구 상무는 대중에게 면식 제로였다. 제조와 판매 현장, 해외 근무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아왔고(언론), 남이 앉기 전에 결코 먼저 앉지 않을 정도로 소탈·겸손한 성격(그룹 관계자)이라고 말하지만 대중은 10년 전에 배포된 증명사진 한 장으로 그를 대면한 게 전부이다. 구 상무에 비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낯익다. 이 부회장은 4년 전 아버지가 쓰러진 뒤 경영 전면에 나섰고, 정 부회장도 고령의 아버지 대신 경영 현안을 챙기고 있다.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발인식에서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고인의 운구차량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셋은 3세와 4세여서 동렬은 아니지만 공통점은 꽤 많다. 무엇보다 포스트 회장 자리를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낙점되고, 가신들에 의해 승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 부회장은 20년 전 증여받은 60억원을 종잣돈으로 비상장 계열사 주식 매입과 상장, 계열사 간 인수·합병을 통해 승계작업을 진행해 왔다. 정 부회장도 2001년 설립된 물류업체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승계작업이 진행 중이다. 구 상무는 2004년 구 회장의 양자로 입적된 뒤 배당과 친족 증여 등을 통해 지분을 늘리고 있다.

 

셋의 승계과정은 아직 미완성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을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지만 지주회사를 설립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선택할지 불투명하다. 최근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문제까지 불거졌다. 결론 여부에 따라 승계구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지난 3월 말 부품계열사인 모비스를 둘로 쪼개 모듈·AS부문을 글로비스에 합병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지만 합병비율이 총수일가에 유리하게 설정됐다는 비판이 제기돼 물거품이 되면서 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재벌들은 인수·합병을 하게 되면 경쟁력이 강화된다고 말하지만 속을 파보면 세습 목적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실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모비스와 글로비스의 합병이 어떤 시너지가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이는 없다. LG의 경우 지주회사 체제여서 구 상무가 (주)LG의 지분을 늘리면 승계는 완성된다. 다만 구 상무도 LG상사가 인수한 물류업체 범한판토스의 지분 7%대를 갖고 있어 일감몰아주기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판토스는 구 상무 지분 매입 뒤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당장 상속에 활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정 부회장이나 구 상무는 합병이나 지분을 늘리는 과정에서 합당한 세금을 내겠다고 말한다. 승계과정에서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이 부회장을 의식한 제스처지만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인식은 곤란하다. 특히 LG의 경우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까지 물려주는 장자승계 원칙은 전근대적이고 고루하다. 장자승계로 가족 간 분쟁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업의 최고가치인 지속 가능성은 담보할 수 없다.

 

지금의 재벌 가업승계는 소유와 경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재벌들은 한국 기업들이 이만큼 성장한 게 오너들의 빠른 결정과 통 큰 투자 등으로 인한 결과물이라며 후계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 1·2세 때와 달리 최근 불거지고 있는 모든 재벌 문제가 후계자의 지배율을 높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감안하면 이런 설명은 온당치 않다.

 

한국 재벌이 피붙이인 단 한 사람의 승계를 위해 산업 생태계를 혼탁하게 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얘기가 아니다. 계열사는 승계를 위한 도구로 활용됐고, 수단인 일감몰아주기는 경쟁사들의 성장을 가로막으면서 재계의 혁신 능력을 후퇴시켰다. 재벌의 투명성 강화와 사회적 책임 요구가 시대적 요청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소유와 경영을 함께 가져가는 재벌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후계자들은 지분율을 높여 그룹을 지배하려 하기에 앞서 경영 능력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후선으로 물러나 대주주 역할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살고 주주도 산다. 이는 최근 부각되는 글로벌 투기자본의 무차별 공격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박용채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