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10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졌다. 출입기자들은 소위 ‘멘털 붕괴’에 빠졌다. 총수와 기업을 동일시하던 경향이 지금보다 더 강하던 때였다. 쓰러지기 불과 한 달 전 이 회장이 귀국하던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수십명의 취재진이 몰려들고, 몇몇 매체에서는 그 장면을 생중계하던 그런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의 부재는 예의 ‘삼성 위기론’의 등판으로 이어졌다. 일부 외신에서는 ‘삼성 최후의 날이 임박했다’ 같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시간 단위로 이 회장의 상태를 전하는 속보가 쏟아졌고, 데스크에 채근당한 현장기자들은 “대체 총수 부재 상황의 ‘비상계획’이 뭐냐”고 캐묻느라 하루 종일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한 것은 오히려 삼성이었다. 이준 당시 커뮤니케이션 팀장(부사장)은 비상계획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 회장이 병원에 있지만 경영에 차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 해오던 대로 경영에 임하고 있다”며 “별도의 경영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임직원들도 일상적 업무를 이어갔다. 월요일 팀별 주간회의를 일정대로 진행했고, 매주 수요일 열리는 사장단 회의도 앞당기지 않고 예정대로 개최했다.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오전 병원에 들러 이 회장 상태를 확인한 뒤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봤다.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은 조용히 그 기능에 충실했다.

 

“역시 삼성”이라는 말이 재계 안팎에서 나왔다. ‘시스템의 삼성’이라는 말도 재조명 받았다. “이 부회장이 이제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당시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모든 의사결정은 조직과 계열사를 통해 독립적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이어 “(삼성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으쓱해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등의 혐의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법원이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25일 이 부회장을 태운 호송버스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을 빠져나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3년이 지났다. 삼성은 총수 부재라는 ‘악재’를 다시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신제품을 들고 글로벌 가전 전시회라는 국제 무대에 등판한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의 입에서 “무섭다” “잠을 못 잔다”는 표현이 나왔다. 이 부회장의 실형 선고로 인한,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이사회가 건재한 기업에서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투자가 최종단계에서 (오너의 승인이 나지 않아) 무산됐다는 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부회장의 실형 선고가 나온 직후부터 “벼락을 맞은 것 같다” “무섭다” “캄캄하다” 등 복수의 익명의 관계자들의 불안감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것이 순수한 불안감의 발로인지,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에 대비하는 구성원의 충심인지는 명확지 않다. 분명한 것은 불과 3년 새 ‘시스템의 삼성’은 사라지고, 총수 부재의 두려움이 지배하는 삼성이 남았다는 점이다.

 

부연하자면 삼성그룹의 진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왔던 미래전략실이 지난 2월 갑작스럽게 해체됐을 때도 위기감이 이렇게 높지는 않았다. 10년, 20년 뒤 진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자며 국내외 명사들을 초청해 특강을 듣던 수요 사장단회의가 사라진 데 대해서도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실종이자, 감옥에 갇힌 총수가 여전히 ‘옥중 경영’을 하는 (나쁜 의미의) ‘코리안 스탠더드’의 부활이다.

 

총수의 부재는 분명한 악재다. 투명한 지배구조와 의사결정구조를 아직까지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우리 기업들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CEO와 구성원들의 태도다. 위기감을 증폭시켜 추후 여론과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다면 심각하다. 다행히 삼성이 총수 부재의 불안감을 해외에서까지 호소하고 있지는 않는 모양이다. 물론 앞으로 실시될 해외 기업설명회(IR)에서도 총수 부재라는 사건을 삼성의 위기나 향후 불안요인으로 연결짓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국내’를 겨냥해 쏟아지는 ‘삼성 위기론’이 점점 더 불편해지는 이유다.

 

<산업부 이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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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